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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탐사기획


[단독/정인갑 前칭화대 교수 인터뷰] "난 中동포·교포 아니라, 조선족이다"

'중국의 문화와 중국인의 기질' 출간..."냉정한 실사구시로 中 아는 것이 중요"
권모술수·이기적·여유로움·보복문화 등 중국인 기질과 한국인 '겉과 속' 지적
한중 동시에 반발할 법한 '발해·고구려' 역사 분쟁에 대한 근거 및 견해 적시
北김정일 수양아들 감옥행 내막, 안중근 기념관 늦게 지은 중국 속내 등 수록
곽재석 원장, "정 교수, 관찰자 입장 아닌 중국 관료 세계의 내부자...민족의 보배"

 

 

뉴스노믹스 최대억 기자 |

 

"조선족은 중국인? 동포? 교포? 한국 여권 소지의 조선족은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한국 정부나 언론에서 '재중교포', '재중동포'라고 하거나 때론 비하·차별 용어로 '조선족'을 사용함에 있어, 조선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한국인들에게 중국에서 자라고 성장해 철저한 조선족 관점에서 민족·역사성등 판별을 통해 냉정하게 '조선족' 통칭을 제시한 책(중국의 문화와 중국인의 기질)이 출간돼 관심을 모은다.

 

정인갑(75) 전 칭화대 교수가 쓴 이 책은 그간 한국 정부(국민 포함)와 중국 정부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각종 이해적 관계에 있는 재한 조선족과 재중 조선족(한국 국적 조선족 포함)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쉽사리 뱉지 못한 속내를 조선족 명칭 뿐아니라 중국인의 기질(권모술수, 이기적 성향, 여유로움, 보복문화 등)과 한국 및 중국 두 나라가 동시에 반발할 법한 '발해·고구려'에 대한 한중 간의 역사문화 분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았다. 

 

이밖에 1989년 천안문 사태의 시말과 1989년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수양아들 감옥행 내막, 탈북자 북송 및 중국의 인권문제, 종교, 각종 사화, 안중근 의사 기념관 늦게 지은 중국 정부의 속내 등 중국에서 실제로 확인하고 기록한 서술 외에도 한중을 오가며 느낀 한국인의 겉과 속 등도 막힘없이 써냈다.

 

'직언직필'을 사명으로 여긴다는 정 교수는 18일 본지에 "사실에 입각해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면서 "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보고 확인해서, 그 객관적 사실을 통해 사람들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상대를 바로 알고 나도 정확히 알아야 서로 거짓없이 채우며 화합으로 나아가는 바른 길이다"고 말했다.

 

정인갑 교수는 "나는 1961년부터 중국공산당의 하층조직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접근, 1962년에 청년단에 가입해 1963년부터 단지부서기직을 5년했다. 1971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 공산당 지부위원직을 12년했고 공산당지부서기 직을 4년 했으며 처장급(處長級) 국가 행정 간부를 10년 했다"면서 "처장은 인구 평균 80만인인 현의 현장, 군의 여단장과 동급이다. 이미 51년이 지났다. 그래서 나는 중국공산당에 대해 평가할 자격이 충분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조선족을 ‘중국동포’라 부르지 말 것

정인갑 교수는 조선족 명칭에 대해 "지금까지 나타난 중국거주 우리 겨레의 호칭을 살펴보면 ‘중국동포’, ‘재중동포’, ‘재중교포’, ‘중국조선족’, ‘조선족’ 등으로 부르고 있다"면서 "결론부터 말하면 ‘조선족’이라 부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이유는 이렇다"며 설파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에 사는 조선족을 4종류 9종으로 구분했다.

 

첫째는 중국 국적 자로, 고구려유민(1종)이다.

 

그는 "고구려가 망한 후 20여만 명이 당나라로 끌려가 중국 서부미개척지로 보내졌다. 1400년 전의 일이니까, 지금 그들의 후예는 약 200만 명이 될 것이다"고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서역 70여 개 나라를 탕평한 고선지(高仙芝)장군으로 서부로 끌려가지 않은 고구려유민은 흑룡강성 동쪽에 모여 말갈족과 같이 발해를 세우는데 참여했으며, 역시 그 후예가 지금은 200만 명쯤 된다고 한다. 

 

두번째는 조선유민(2종)이다.

 

1619년 2월 후금과 명의 살이호(薩爾湖) 전쟁에 조선은 강홍립(姜弘立)과 김경서(金景瑞) 장군이 통솔하는 1만3000명의 군사를 파견, 명을 지원했다.

 

그들은 패배했거나 투항해 후금의 군대가 됐다는 것.

 

살이호전쟁의 보복으로 명은 1627년(정묘년)과 1636년(병자년)에 조선을 침범, 이른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그는 "두 번의 호란 때 후금군은 조선인 60만 명을 노획해 갔으며 끌려가는 와중에 죽은자, 후에 투항한 자까지 합쳐 50만 명이 넘을 것이며 그들의 후예가 500만 명은 될 것이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철령지휘첨사(鐵嶺指揮僉事) 이성량(李成良)이다.

 

1982년 인구조사 때 요녕성 남쪽의 두 박 씨 성의 마을이 원래 만주족이던 것을 조선족으로 고쳤으며 중국정부는 이를 인정해 줬다.

 

하나는 본계(本溪) 만족자치현 소시진(小市鎭)의 박보(朴堡)이고 다른 하나는 대석교시 진둔(陳屯)이다.

 

세번째는 북한 국적자이다.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됨에 따라 재중국 조선인의 절대대부분이 CK로 변했지만 동북삼성에 거주하는 조선인에게만 국한시켰다.

 

산해관 이내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CK의 신분이 되지 않고 북한의 해외공민으로 됐다.

 

정 교수는 본문에서 1860년대부터 1945년까지 중국으로 이민해서 중국국적을 취득한 자를 서술상의 편리를 위해 ‘CK’로 표현했다.

 

그들은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후 중국으로 이민한 북한사람으로, 이들은 북한의 해외공민의 신분이며, 대부분 6·25전쟁의 피난민이다.

 

그리고 탈북자이다. 1986년부터 중국에 탈북자가 생기기 시작했고 정확한 통계가 없으며 지금 3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네번째가 한국 국적자이다. 

 

한국여권을 소지하고 중국에 거주하며 장기거주자(연속 1년 이상 거주한 자)만 약 80만 명쯤 된다고 본다.

 

다섯번째가 제3국 국적자로 한국을 제외한 세계 많은 나라로 이를테면 미국, 캐나다, 호주, 일본에서 중국에 온 사람들이며 그들은 주재국 여권 또는 영주권을 소지하고 있다.

 

따라서 정 교수는 "이상 중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 동포는 4가지 큰 종류, 9종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들을 일괄해서 ‘중국동포’라고 부르면 애매하다"면서 "어느 부류의 사람을 말하는지 확정지을 수 없다. 그중 ‘고구려유민’은 이론상의 동포에 불과하며 ‘조선유민’은 지금 나타난 자가 2개 마을 1000명 미만이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거주 우리 동포는 사실상 1860∼1945년에 이민한 조선인 CK. 2010년에 진행한 중국 제6차 인구조사에 따르면 CK인구는 183만929명이다. 중국국적 소유자"라면서 "CK 중 1937∼45년 이민자를 조직이민이라 부르며 대부분 중국 흑룡강성 목단간 지역과 그 주위에 분포돼 있다. 그들은 한국에 호적이 있고 적지 않게는 2008년부터 한국에 재입국해서 한국국적을 취득하고 산다"고 밝혔다. 

 

그는 "즉 CK인구가 3분의 2를 차지, 북한 국적자와 한국 국적자 인구가 나머지가 된다"면서 "CK를 ‘중국조선족’이라 부르고 북한 및 한국 국적자를 ‘중국동포’라 부르자고 한다. 교포는 주재국의 국적을 소유하지 않은 자만 일컬으므로 CK를 ‘중국교포’라 부를 수 없다. 중국 외에 다른 나라에 ‘조선족’이라 부르는 명칭이 없으므로 ‘중국’ 두 글자를 빼고 ‘조선족’이라고만 불러도 괜찮다"고 정리했다. 

 

그는 "한국의 일부 정치인과 많은 사람들이 ‘조선족’이란 명칭은 중국정부가 CK에게 지어준 모욕적인 칭호라고 말하는데 이는 전혀 근거 없는 견해"라면서 "‘조선족’은 단지 명칭이 아니라 그만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신분증이다. 중국정부는 소수민족에 대한 우대정책이 많으며 CK는 조선족이기 때문에 이런 우대정책을 모두 향수할 수 있다. 재중국 일본인도 조선족 못지않게 많으며 재중국 러시아인도 적지 않다. 그들은 중국 소수민족의 계열에 들지 못했으므로 소수민족에게 차려지는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고 밝혔다.

 

그는 "56가지 민족 중 대부분 토착민족이다. 약 10여 가지의 외래 소수민족이 있는데 그들이 중국에 정착한 역사는 모두 1000년 이상이 된다"면서 "조선족은 중국에 정착한지 50여년밖에 안 되지만 소수민족의 칭호를 부여받고 우대정책을 누린다는 것은 파격적으로 조선족을 우대하여 인정한 것이다. 조선족이 중국혁명과 건설에 많은 공헌을 한데 대한 보답이다. CK가 조선족으로 된 것은 모욕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영광이다"고 부연했다.

 

정 교수가 이 책을 쓴 결정적 이유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앞서 본지 기자는 직접 쓴 '무인 최대억기자의 4786일(나, 그리고 조선족 사람들)' 제목의 건넨 책 내용 중에 "(한국이)조선족을 한민족 일원으로 너그럽게 포용하며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 관계를 강화해야하는지론에 고집을 세운다"며 "조선족이 양국 관계의 우호 증진만 아니라 남북 통일에도 이바지할 수도 있고, 그 반대(적)가 될 수도 있기때문"이라는 문구에 대해 정 교수가 "잘썼다"고 고개를 끄덕인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읽혀진다. 

 

이번에 정 교수에게 축사를 쓴 곽재석 한국이주동포정책연구원 원장은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왜 특정의 생각을 하고 특유의 행동을 하는지 그 배경과 이유, 논리를 이해한다는 것만이 아니다"며 "자신들의 입장과 이익만을 고수하면서 결코 상대의 어려움과 불편함을 배려하지 않는 관계에서 선 사람들을 서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 한중 양국의 국민 사이에서 종종 불거져 나오는 상대를 향한 혐오와 멸시, 불신과 냉대의 행동을 서로가 너무나 잘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배척과 차별이 국가적 이기주의에 우리가 함몰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인갑 교수는 본인이 밝힌 바와 같이 중국 조선족 3세대이다. 한반도가 제국주의 총칼 앞에 맥없이 무너질때 눈물을 머금고 이 땅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우리 민족의 후예이다"며 "읽다가 혼자 웃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아하! 그런 것이기도 하구나 하는 깨달음도 준 이야기를 묶어 한국인들 앞에 내놓은 조선족 제3세대 정인갑 교수에게 큰 감사와 칭송의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했다.


이어 "그가 살펴보는 중국과 중국인의 문화와 기질은 제 3자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면서 "그는 중국 공산당원으로서 중국 근대 역사 발전의 대 격변기를 몸소 겪고 익히며 살아오면서 중국 정부와 관료 세계의 내부자로서 중국 국가운용의 가장 중심 중의 중심에서 중국인들과 동고동락하며 중국이라는 국가를 만들어낸 주역중의 한사람이다. 가히 조선족이 품어 만들어낸 민족 보배라고 칭송할 만하다"고 부연했다.  

 

또 장결률 전 연변일보 정치부주임은 "그의 저서들을 읽노라면 동서고금을 섭렵하면서 증명하기에 설득력이 강하고 심도가 깊다. 더욱이 자기가 친히 체험한 사실로서 심각한 사상을 생동하게 표현하여 독자들의 흥취를 자아내게 한다"면서 "한국의 독자와 중국의 조선족은 물론이고 기타 민족들이 대중화를 연구하고 공부한는데 아주 절실한 교재로 기꺼이 추천하는 바이다"고 축사를 썼다. 

 

정인갑 교수는 누구?

 

정 교수는 1968년도에 문화대혁명(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운동)때문에 대학입시를 놓치고 그 이듬해에 입대, 5년동안 군생활을 했다.

 

1976년에 연변문예잡지사에 입사, 편집으로 있다가 1978년 문화대혁명 종결에 따른 대학입시가 전면 회복되자 31세의 나이로 중국 북경대학교 입시를 치뤄 당시 연변지역 문과 수석으로 합격했다. 

 

정 교수는 대학에서 중문학과(고전문헌 전공, 고서 정리의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 설립된 학과) 졸업 후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에 해당하는 중국의 중화서국(中華書局)에 몸을 담아 정년 퇴임했다.

 

정 교수는 1986년부터 중앙민족대학, 청화대학 중문학부, 하남성 남양사범대학 등에서 객원교수로 지내며 한중번역, 음운학, 한국어 등을 지도했다.

 

또 북경고려문화경제연구회의 부회장 겸 사무국장, 북경조선족중장년협회 회장, '북경저널'과 '북경뉴스' 부주필, 주필, 북경삼강학교(사립조선족소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북한 평북 철산군이 고향인 그는 1947년 중국 요녕성 무순시에서 태어났으며, 1918년에 가족이 중국으로 이주,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동포 3세’ 미국 식으로는 ‘동포 2.5세’, 중국에선 ‘조선족 제3세'이다.

1987년 2개월 한국 체류를 시작으로 한국과 연을 맺어 중국을 오가며 현재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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