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윤의 영웅의 부활] 시대정신과 윤석열
그해 겨울, 나는 마지막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날마다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누워서 라디오나 듣는 특별할 것 없는 시골 생활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읍내에 갔다가 시간이 남아 만화방에 들렸다. 네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만화들을 뒤적이다가 제일 위쪽에 꽂혀있는 표지가 낡은 한문 제목의 책에 눈길이 갔다. 궁금해서 한 권 뽑았다. 제목이 아마도 <불공마영>이었을 것이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몇 장 넘겼다. 내공 운기조식 주화입마 등 처음 보는 단어들이었다. 그러한 용어와 세로 읽기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며칠이 걸렸지만, 강호에서 펼쳐지는 무림의 판타지가 거기에 있었다. 그렇게 우연히 나는 무협지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날마다 골방에 처박혀 500여 권을 읽었다. 그 2달 동안을 나는 장풍을 날리고 경공술을 펼치는 무림의 고수로 살았다.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 후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현실의 학생 신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꿈과 현실, 희망과 절망이 서로 부딪쳐 충돌하는 한 나에게 무림 고수들의 전성시대는 계속될 것이다.
그 무협지의 세계를 완벽하게 영상으로 재현한 영화가 있다. 왕우의 <외팔이 검객> 시리즈 이후로 천하통일의 대의를 역설한 영화, 장이머우 감독의 <영웅>이 그것이다. 때는 전국 7웅이 서로 침략하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천하통일을 눈앞에 둔 진나라 왕 영정(후에 진시황)은 암살의 위험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자객 중에 장천과 파검, 비설은 영정마저도 어쩌지 못하는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닌 고수들이었다. 1만여 명의 군사가 궁을 지켰으나 영정은 그것도 안심하지 못하여 자신의 주변으로 백보금지령까지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세 명의 자객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자가 홀연히 나타났다. 무명이라는 고수였다. 그 공로로 그는 10보 앞에서 영정을 알현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영정은 모르고 있었다. 무명이 진나라의 침략으로 가족을 잃은 조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10년 동안 10보 안에만 들어오면 그 어떤 고수도 다 죽일 수 있는 십보필살검법을 익힌 자객이었다.
무명은 자기를 의심하는 영정에게 그 세 명의 고수를 어떻게 죽였는지 설명해 나갔다. 영정은 무명과 주고받은 문답에서 그가 자객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영정이 무명의 10보 안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그의 무술로는 무명의 검법을 당해낼 수가 없었으니 그는 탄식했다. “천하통일의 대업이 여기서 멈춰진단 말인가….” 영정은 체념하고 자신의 검을 무명에게 던졌다.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에 뜻밖의 반전이 일어났다. 무명이 스스로 검을 거둔 것이다. 10년을 준비해서 잡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는데…, 어이없게도…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메시지에 있었다. 천하통일이라는 대의 때문이었다. 하루빨리 영정이 대업을 완수케 하여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끝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살아있어야 한다. 이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대의 앞에 무명의 복수는 한낱 개인의 사사로운 원한밖에 안 되었으니, 막판에 이를 깨달은 무명은 영정을 죽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 무명의 차례다. 그는 궁을 나오다가 군사들이 쏘는 화살을 맞고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영정은 그를 국장(國葬)으로 후하게 장사지내주었다. 그는 죽어서야 비로소 진정한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영웅>에서 영정의 시대정신은 통일이었다. 그는 법치를 통치의 핵심으로 삼아 대업을 완수했으니 기원전 230년부터 나머지 6국을 정복하여 춘추전국시대(BC770∼BC221)를 끝냈다. 그러나 시황제(始皇帝)의 중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통일된 지 12년 만인 BC209년에 멸망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조나라 사람으로 대의 앞에서 부모의 원수를 포기했던 자객 무명의 죽음이 허무해지는 순간이었다.
영생불멸의 존재 같았던 진시황이 죽자 중국은 진승오광의 난을 필두로 반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항우와 동네 백수건달 유방이 천하를 놓고 벌이는 쟁투를 다룬 영화가 있다. <영웅>의 속편 같은 작품으로 <초한지 영웅의 부활>이 그것이다. 이 영화에서 진의 수도 관중을 접수한 항우는 진의 마지막 황제 자영을 토막 내서 죽인 후에 유방과 한신 등의 부하 장수들을 모아놓고 일장 훈계를 늘어놓았다.
“많은 이들이 내게 이 황궁에 살라 했지만 천만에, 또 다른 진시황이 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서라도 난 이 황궁을 없앨 것이다. 우리는 진나라의 과거를 답습하고자 정복한 것이 아니다. 진시황은 법령에 따라 같은 색 옷을 입고, 같은 수레를 타고, 같은 언어를 말하도록 했다. 모든 백성이 하나가 되길 원했어. 그러나 나는 천하를 19개로 나누어 제군들에게 나눠주겠다. 내 곁에서 싸워준 전우들이여! 각자 영토로 돌아가 제군들만의 말을 하고, 제군들만의 역사를 써라.”
이 대사에서 보듯 항우는 진시황 영정이 천하를 통일하고 세운 제국을 해체하려 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그 당시의 시대적 사명에 반하는 것이었다. 항우는 황제의 자리보다는 다른 제후국들의 우두머리로서의 초나라 패왕에 만족했다. 천하통일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거스른 항우의 결정이 자신은 물론 유방과 한신의 역사까지 바꿔놓았으니, 그 당시에 누구인들 항우에게 다가올 운명, 그의 최후를 어찌 짐작이나 했었겠는가.
어쨌든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중국은 항우의 세상이었다. 논공행상에 따라 유방은 한 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만족하지 않았으니 어마 무시한 진 황궁을 바라보며 외쳤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는 따로 없다!”
그 순간 마침내 그의 가슴 속 욕망의 문이 열리고 만 것이다. 유방은 천하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망을 드러냈다. 그는 더는 동네 건달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유방과 항우는 원수가 되었다. 이제부터는 두 영웅 간의 전쟁이었다. 그것은 유방에게 진시황 영정이 건설했던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통일 전쟁을 의미했으니 그의 시대적 사명은 천하통일인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이 있다. 나는 항우와 유방이 내세웠던 서로 다른 대의를 그들의 승패를 결정지은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로 꼽는다. 이 두 영화 <영웅>과 <초한지 영웅의 부활>에서 보듯이 지도자에게 시대정신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그렇다면 지난 5년의 대한민국은 어떠했을까? 다음은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의 취임사의 한 대목이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그는 공정과 정의의 집행자였다. 임기 내내 적폐 청산을 외쳤다. 두 명의 대통령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을 감옥으로 보냈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영원할 것 같던 그의 세상도 막을 내렸다. 그는 청와대를 나오면서 다 이루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무 탈 없이 양산으로 내려갔다.
그렇다면 그가 남겨놓은 대한민국은 어떤가? 조국 사태에서 보듯 기회는 불평등했고, 과정은 불공정했고, 결과는 정의롭지 못했다. 특권과 반칙이 횡행했다. 서로 원수처럼 진영의 골은 더 깊어졌으니 그는 자기편만의 대통령이었다.
그동안에 대한민국은 그 누군가에 의해 스스로 삶의 의지를 포기하는 악몽의 길로 들어섰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잭 니콜슨이 출연했던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배경이 되었던 정신병원에서의 그 악몽 말이다. 살아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선한 얼굴의 간호사에 의해 정신병자로 몰린 사내는 죽어서야 비로소 그 악몽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악몽에 사로잡혔다.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혹시 그런 정신병원이 아닐까 하는 의심으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1977년에 상영되었다. 45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사내가 죽임을 당하는 영화의 그 마지막 장면이 떠올라 전율했다.
지금 우리가 법치를 농락하고 공정과 상식을 파괴한 자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결국 정신병원의 그 악몽에 갇힐 것이다. 그래서 정권교체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새 출발의 용산 시대를 열었다. 이제 우리는 희망을 품어도 될까? 지난 대선전에서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정과 정의, 상식을 외쳤다. 그러다 보니 윤석열 하면 그것이 먼저 떠올랐다. 그 만의 전유물이 되었다.
기회는 절망의 끝에 오기도 한다. 가짜뉴스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자들이 잘사는 무법천지의 대한민국은 지금이 기회다. 공정과 정의, 상식이 그의 시대정신이라면 우리는 그를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다. 그것들만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이다. 하루하루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법치를 토대로 한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원한다.
□송동윤 영화감독은
송동윤 감독은 그동안 시나리오를 만들고, 영화를 제작·연출하는 건 물론 대학에서 영화학도를 가르치고, 영화를 평론하고, 소설을 쓰는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해 왔다. 현재 ‘무비웍스’에서 네플릭스에 선보일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송 감독은 <서울이 보이냐>, <바다 위의 피아노> <학교 반란> 등의 영화를 제작·연출했다. 또 ‘HID 북파공작원’(2000·시나리오), ‘우리 선생님’(2002·시나리오), ‘송동윤의 영화로 보는 세상’(2002·평론집), ‘흔들리면서 그래도 사랑한다’(2012·소설), ‘블랙아이돌스’(2014·소설), ‘5월 18일생’(2020·소설) 등을 썼다.
독일 보훔대학교 (Ruhr Universitaet Bochum) 연극영화 TV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한일장신대 연극영화과 교수 등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