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과 카게무샤
혼란의 시대에 왕은 늘 신변의 위험을 안고 살았다. 그의 주변으로 호위무사를 세워놓고도 안심하지 못하여 수시로 침소를 바꾸거나 모양이 똑같은 여러 대의 마차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러한 눈속임도 왕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다. 자객들은 바람처럼 다가와 순식간에 그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그래서 왕은 자기 대신 죽어 줄 대역을 등장시켰다. 외모가 비슷한 사람을 뽑아 왕의 역할을 하게 한 것이다. 이런 자들을 그림자 또는 카게무샤라고 한다.
여기 광해군의 그림자를 다룬 영화가 있다.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다. 영화의 내용은 이랬다. 광해군 8년, 독살의 위험에 놓인 광해가 궁을 떠나있는 동안에 왕 노릇을 해줄 그림자가 필요했다. 도승지 허균은 저잣거리에서 부패한 조정과 권력자들을 풍자하며 살아가는, 이런저런 재주와 말솜씨가 뛰어난 만담꾼 하나를 데려왔다. 광해를 그대로 빼닮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루아침에 왕이 된 그는 허균으로부터 말투, 국정을 논하는 법, 걸음걸이 등 왕의 법도를 배우면서 왕 노릇을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진짜 왕과는 달리 글자도 모르는 천민 출신의 그가 그 며칠 사이에 따뜻한 가슴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펼쳤던 것이었다. 여기서 허균은 가짜 광해에게서 조선의 희망을 보고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진짜 왕이 되고 싶은가? 사월이란 아이의 복수를 하고 싶다면, 백성의 고혈을 빠는 자들을 용서치 못하겠다면,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왕, 진정 그것이 그대가 꿈꾸는 왕이라면 그 꿈 내가 이루어드리리다.”
가짜 광해는 허균의 놀라운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왕을 만들어 준다는 데……, 누구는 왕이 되기 위해 조카 형제까지 죽이는 판인데……, 나는 솔직히 그가 허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바랬다. 그랬다면, 내가 알고 있는 조선의 역사는 달리 기록됐을 것이다. 강한 조선, 병자호란도 일제 36년도 일어나지 않은……. 그러나 나의 상상력은 거기까지였다. 그가 거절했으니까.
“나 살자고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난 싫소. 내 꿈은 내가 꾸겠소이다.”
이런 점에서 가짜 광해는 진짜 광해와 비교되었다. 궁으로 돌아온 진짜 광해가 첫 번째로 내린 명령은 가짜 광해를 죽이라는 것이었으니까.
여기서 진짜 광해, 역사 속의 광해에 대해 따져볼 문제가 있다. 중국의 명·청 교체기에 왕이 된 광해는 임진왜란으로 황폐해진 조선을 재건해야 할 시대적 사명이 있었다. 그러나 자기 정치를 펼치기에는 태생적 토대가 너무나 취약했으니 그는 후궁의 소생이었고, 그것도 둘째였다. 그런데 무능한 선조가 늘그막에 여자를 들여 아들을 보았다. 영창대군이 태어난 것이다. 그 순간부터 그의 자리는 불안해졌다. 세자를 적자인 영창대군으로 바꿔야 한다는 논란 속에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것에 대해 나름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씨가 되어 그 후 인조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때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3개였다. 폐모살제(廢母殺弟)와 명에 대한 배은망덕(背恩忘德), 그리고 궁궐증권이 그것이었다. 그 후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역사 속에서 극명하게 갈렸다. 한쪽에서는 패륜을 저지른 폭군으로 낙인찍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존화주의(尊化主義)적 사대에서 벗어나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로 칭송했다.
쿠데타로 왕좌에 오른 인조는 분노가 하늘에 다다를 정도로 무능했다. 병자호란으로 오랑캐라 욕했던 청 태종 앞에서 그는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렸다. 그 치욕스러운 그 날 광해군은 제주도에 유배 중이었다.
다시 <광해, 왕이 된 남자>로 돌아와서, 이 영화에서 간신과 비교되는 충신이 한 명 있었다. 우직하면서도 고지식한 호위무사였다. 어느 날, 그가 보기에 광해가 이상했다. 혹시 저자가 가짜가 아닐까 의심을 하고 있었는데……, 때맞춰 그의 눈에 가짜라는 결정적 단서가 포착됐다. 그는 주저 없이 광해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다. 그 순간 크게 노한 중전이 그를 꾸짖으면서 광해는 탄로 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호위무사는 대역죄를 범했다며 목숨을 끊으려 했다. 나중에 광해가 그를 불러 말했다.
“목숨을 걸고 임금을 지켜야 할 호위무사가 제 마음대로 죽겠다고 칼을 물다니 그것이야말로 대역죄가 아니고 무엇이냐? 내 목에 칼을 들이댄 거야 열 번이라도 상관없다. 허나 네놈이 살아야 내가 사는 것. 니 목숨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것이냐? 이 칼은 날 위해서만 뽑는 것이다.”
광해의 그 말에 감동한 호위무사는 격하게 흐느꼈다. 그 후에 그도 광해가 가짜라는 걸 알게 되지만 그에게는 가짜 광해가 진짜 왕이었다.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짜 왕에게서 봤기 때문이었다.
궁으로 돌아온 진짜 광해가 가짜 광해를 죽이라 명했고, 추격자들이 가짜 광해를 뒤쫓았다. 그때 그들의 앞을 막아선 사람이 있었다. 바로 호위무사였다. ‘그자는 가짜다’라는 추격자들의 말에 호위무사가 비장하게 꾸짖었다.
“그대에게는 가짜일지 모르나 나에게는 진짜다.”
호위무사는 가짜 광해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도망가던 그가 돌아와 호위무사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진짜 충신을 마주하는 내 마음이 짠해지는 순간이었다.
가짜 광해의 이름은 하선이었다. 그는 광해의 그림자로 궁궐에 들어갔지만, 단지 그림자로만 살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자기 정체성을 지켰다. 그는 광해가 아닌 하선으로 말하고 행동했다. 도승지 허균은 그런 그에게서 진짜 왕의 풍모를 보았다. 그래서 허균은 ‘그대가 원하면 왕이 되게 해주겠다’라는 제안을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거절했다. 그는 광해가 아닌 하선이었기 때문에.
카게무샤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 주인을 절대 벗어날 수가 없다. 그 주인이 죽거나, 카게무샤가 배신해서 주인을 죽이기 전까지는……. 여기 <광해, 왕이 된 남자>와는 다른 결말의 영화가 있다.
장이머우 감독의 <삼국-무영자>다. 내용은 이랬다.
때는 삼국시대 중국, 폐국의 장군 도독은 전쟁에서 패해 중상을 입었다. 거기다가 불치병까지 걸리자 그는 자기 집 밀실에 숨고, 자신을 닮은 카게무샤를 내세워 자신의 역할을 하게 했다. 그의 최종목표는 빼앗긴 땅을 되찾고 왕을 제거한 후 자신이 왕좌에 앉는 것이었다. 도독은 그 일을 자신의 카게무샤에게 맡겼다.
카게무샤의 이름은 영주다. 원래 길거리 거지였는데 도독이 데려다가 자신의 카게무샤로 키웠다. 영주는 자신을 거둬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도독이 시키는 데로 자기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오직 도독의 그림자로 도독만을 위해서 살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영주가 카게무샤에 깊이 빠져들면서 권력의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주인과 그림자의 경계가 지워지기 시작했고, 이제 그는 그림자가 아닌 도독으로 살고 싶었다. 그렇다면, 달리 방법이 없다. 무조건 도독을 죽여야 한다. 때마침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도독을 제거했다. 이로써 그림자의 주인은 사라졌고, 이제부터는 그가 도독이었다. 그런데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그의 권력을 향한 질주는 멈출 줄을 몰랐으니 그는 왕까지 죽였다. 이로써 패국은 그의 나라가 되었다.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에 영화 두 편을 소개한 이유는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다. 사면초가에 빠진 이재명은 누구일까? 임금을 만들어 주겠다는 허균의 제안을 나 살고자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가짜 광해 하선일까? 아니면 왕을 제거하고 끝내는 자신의 그림자까지도 죽이려 했던 도독일까? 그리고 이재명의 카게무샤들은 누구일까? 가짜인 줄 알면서도 가짜 광해를 위해 싸우다 죽은 호위무사일까? 아니면 권력을 잡기 위해서 자신의 주인까지도 물어뜯어 죽였던 가짜 도독 영주일까?
내 대답은 권력의 속성을 가장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는 영화로 대신한다. 제목만 보고, 할리우드 영화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배우들이 독일어를 하고 있었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40여 년 만에 리메이크로 부활한 독일 영화다. 다음은 거기서 나온 대사다.
“개에게 뼈다귀를 던져주면 개는 뼈다귀를 물어뜯지. 인간에게 권력을 주면 그 인간은 짐승이 돼.”
□송동윤 영화감독은
송동윤 감독은 그동안 시나리오를 만들고, 영화를 제작·연출하는 건 물론 대학에서 영화학도를 가르치고, 영화를 평론하고, 소설을 쓰는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해 왔다. 현재 ‘무비웍스’에서 네플릭스에 선보일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송 감독은 <서울이 보이냐>, <바다 위의 피아노> <학교 반란> 등의 영화를 제작·연출했다. 또 ‘HID 북파공작원’(2000·시나리오), ‘우리 선생님’(2002·시나리오), ‘송동윤의 영화로 보는 세상’(2002·평론집), ‘흔들리면서 그래도 사랑한다’(2012·소설), ‘블랙아이돌스’(2014·소설), ‘5월 18일생’(2020·소설) 등을 썼다.
독일 보훔대학교 (Ruhr Universitaet Bochum) 연극영화 TV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한일장신대 연극영화과 교수 등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