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윤의 영웅의 부활>
공포와 정치인
공포에 익숙해지다
그해 가을, 나는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1987년의 모든 절망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김포공항을 출발한 지 23시간 만에 낯선 도시 보훔에 도착했다. 교민의 도움으로 당분간 비어있는 기숙사에 짐을 풀었고, 다음 날부터 방을 구하러 다녔다. 1달째 되던 날,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 날도 나는 주소를 들고 거리를 헤맸다.
‘오늘도 구하지 못한다면… 그냥 서울로 돌아가 버릴까…’ 하는 그런 갈등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날 그 막다른 지경에서 마침내 방을 구했으니까. 지금 기억으로는, 주소가 하인츠만 도로 (Heintzmann Str.)였다. 보훔 대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작나무 숲이 끝나는 지점에 있었다.
히틀러 시대에 지어졌다고 했다. 4층 목조건물로 내 방은 다락방 아래층이었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나무가 삐걱거렸고,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가면서… 그 소리가 불길했다. 그러나 설령 귀신이 나오는 흉가라고 했어도 나는 달리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 유학생인 내가 1달 만에 해냈던 그 일은 기적이었으니까. 실상이 그랬으니 내가 얼마나 흥분했겠는가. 내 방에서의 첫날밤은 그 벅찬 감격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그 방에서의 두 번째 날이었다. 저녁부터 뭔지 모를 불쾌한 기운들이 나를 덮쳐왔다. 얼핏 얼핏 소름이 끼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계단의 그 기분 나쁜 소리는 어떤 징조의 시작이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침대에 반쯤 누워 침대 앞에 놓여있는 TV를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정신은 멀쩡했고…, 그때 누군가가 침대 옆에 서서 나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중년의 사내였다. 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얼마나 놀랐는지, 후다닥 일어나다가 발을 헛디디어 침대 밑으로 굴렀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그 남자는 누구지?’ 냉기가 감도는 방을 둘러보며 나는 애써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약해졌을 때 꾸는 악몽. 그런데도 공포가 계속 밀려왔다. 나는 다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를 쳐다봤던 그 사내의 얼굴이 너무 생생했었으니까.
그다음 날 밤이었다. 그 방에서의 세 번째 날이었다. 침대에 누웠다. ‘오늘도 그 사내가 찾아올까?’ 나는 잠들지 않기 위해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가 얼핏 잠이 들었다. 갑자기 천장에서 내 머리 쪽으로 밧줄이 내려왔다. 내 목을 매달기 위해서…. 어젯밤의 그 사내가 침대 옆의 안락의자에 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살려줘!!’ 나는 팔을 휘저으며 벌떡 일어났다. 천장 전깃줄에 달린 전구가 눈에 들어왔다. 내 목을 노렸던 밧줄은 없었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나는 그 귀신과 동거를 시작했다. 내 생활은 꿈인 듯 현실인 듯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처음 1달 동안은 날마다 나타나는 귀신이 갑자기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그것은 갇힌 공포였다. 방을 구해 나가기 전까지는 어찌하지 못하는, 마치 내 몸 어딘가에 붙어서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 같은 공포였다.
그러나 나는 날마다 살아 있었다. 그 귀신은 나를 죽일 작정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판단에 이르자 나는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고, 하루하루 내가 그 귀신에 익숙해 지면서 서서히 공포는 무뎌졌다. 3개월 후 학교 기숙사로 이사 갈 때쯤에는 그 귀신이 더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오히려 그의 신상이 걱정될 정도였으니까.
내가 이사한 이후로 4개월이 흘렀다. 그 귀신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귀신의 방에서 살았던 한국 학생이 우리 기숙사로 들어왔다. 그날 저녁 식당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가 나를 붙잡고 진지하게 물었다. ‘날마다 밤에 귀신이 나타났었는데, 너도 그랬냐’고. 내게 찾아왔던 바로 그 귀신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우리는 동시에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날 이후로 또 몇 년이 흘렀다. 내가 박사 논문을 쓸 즈음이었다. 기숙사 우편함에 꽂혀있는 지역 신문에 살인사건이 실렸다. 놀랍게도 그 귀신의 집이었다. 독일 학생 2명이 그 집의 다락방(Dachzimmer)에서 살았는데, 그중 한 명이 이웃집 여자(학교 교사)의 목을 식칼로 잘랐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이름은 토마스였다.
독일의 낯선 도시에서의 그 공포도 이제는 추억이 돼버렸다. 광에 넣어둔 물건을 꺼내 먼지를 털어 내듯 귀신 이야기를 했다. 하면서도 멋쩍었다. 그런데도 여기서 다룬 이유는 다음에 있다. 아무리 무서운 공포도 반복되면 그 공포에 익숙해지고, 결국에는 그 공포가 공포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피할 수 없는 공포는 북핵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공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미 그 단어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설마∽ 설마∽ 하다가 헉∽ 할 때는 이미 서울이 지도에서 사라진 다음일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더 무서운 공포는 다른 데에 있었다. 만약 당신이 핸드폰을 분실했다면? 그런데 그 핸드폰에 당신의 비밀이 저장돼있다면? 그에게 그것은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살 떨리는 공포가 될 것이다.
원초적 공포
여기 공포를 내용으로 하는 영화가 있다. 리처드 기어 주연의 <프라이멀 피어>다. 번역하면 <원초적 공포>로 내용은 이랬다.
시카고에서 존경받는 가톨릭 대주교가 피살되었다. 그 시간에 한 사내가 현장에서 도망가다 붙잡혔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열아홉의 청년 애런(에드워드 노튼)이었다. 성공한 변호사 베일(리처드 기어)이 무보수로 그를 변호하겠다고 나섰다. ‘소심하게 보이고 말까지 더듬는 저런 애가 어떻게 살인을….’ 베일은 그가 범인일 수가 없다고 단정했다.
그러던 중에 베일은 애런과 그의 친구들의 변태적 성행위가 찍혀있는 비디오테이프를 찾아냈다. 대주교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이 테이프의 내용이 애런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낙담한 베일은 애런을 찾아가 테이프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애런이 발작을 일으켰다. 갑자기 베일을 몰아붙이고, 살인은 애런이 아닌 로이가 했다고 소리쳤다. 욕설을 퍼부으며 파괴적으로 베일의 멱살을 잡고 쳐다보는 그의 표정이 섬뜩했다. 그 순간이 지나자 그는 다시 소심한 애런으로 돌아오고, 조금 전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했다. 애런에게는 또 다른 자아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로이다.

그는 기억상실의 다중인격자였다. 범죄자가 아닌 환자로, 결국 그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여기서 영화가 끝나는가 했다. 그런데 아직 아니었다. 반전이 남아있었다. 그 진실이 베일과 애런의 마지막 대화에서 드러났다. 다중인격은 로이의 연기였던 것이었다. 애초에 애런은 없었다. 폭력적이고 야비한 로이가 소심한 애런을 연기했으니까. <프라이멀 피어>는 이렇게 원초적 공포를 남기고 막을 내렸다.
이제 나는 영화 속의 캐릭터들을 대한민국의 광장으로 소환한다. 대장동 사건으로 기소된 인물 중에서 로이는 누구일까? 정치인으로 범위를 좁혀 찾아보면 금방 그 답이 나온다. 그래서 누구냐고?
그 정치인이 최근에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기 위해서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라고. 사람이 얼마나 뻔뻔하면 이런 말을 다 할까? 이제는 그의 정신세계가 두렵다. 공포를 느낄 정도로.
□송동윤 영화감독은
송동윤 감독은 그동안 시나리오를 만들고, 영화를 제작·연출하는 건 물론 대학에서 영화학도를 가르치고, 영화를 평론하고, 소설을 쓰는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해 왔다. 현재 ‘무비웍스’에서 네플릭스에 선보일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송 감독은 <서울이 보이냐>, <바다 위의 피아노> <학교 반란> 등의 영화를 제작·연출했다. 또 ‘HID 북파공작원’(2000·시나리오), ‘우리 선생님’(2002·시나리오), ‘송동윤의 영화로 보는 세상’(2002·평론집), ‘흔들리면서 그래도 사랑한다’(2012·소설), ‘블랙아이돌스’(2014·소설), ‘5월 18일생’(2020·소설) 등을 썼다.
독일 보훔대학교 (Ruhr Universitaet Bochum) 연극영화 TV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한일장신대 연극영화과 교수 등를 역임했다.